2019.10.16
출처 -서울특별시도시재생지원센터(https://surc.or.kr/changes/147)
서울도시재생이야기관 <핸즈인서울>에서는 성수동의 수제화 명장 전태수의 작업을 소개하는 <Hands in Seoul_성수동>전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성수동에서 39년 동안 수제화를 제작해온 전태수 명장의 손과 이야기에 주목한다. 모든 공정이 손으로부터 시작되어 손으로 완성되는 그의 수제화에는 성수동의 삶과 역사가 담겨있다. 전태수는 성수동에서 수제화를 제작하며 지역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오래된 제조업 공장과 창고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들어선 개성이 가득한 편집숍과 카페. 익숙함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성수동의 장소적 특수성은 전태수가 만들어내는 수제화와 닮아 있다. 성수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하고 익숙한 붉은 벽돌 건물과 같은 로퍼, 독특한 개성을 자아내는 복합문화공간과 같은 구두 등, 전태수의 수제화는 성수동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수제화를 만드신 지 얼마나 되었나요?
수제화 만든 지는 반세기 정도 되었어. 하다 보니 올해로 벌써 50년이 되었네.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68년인가 14살부터 시작해서 구두공장에서 심부름하고 다락방에서 잠자가면서 배웠어. 도중에 다른 일을 하고 싶기도 했었는데, 그렇게 안 하고 나는 계속해서 했어. 예전에는 체계적으로 잘가르쳐주지도 않고, 잘못하면 맞았어. 이렇게 잘못 하면 되냐고 막 뭐라고 하면서 머리를 '빡' 소리가 나게 때렸지. 울면서 일했어.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햇빛도 보지 못하고 일했지. 성수동에는 언제쯤 오셨나요? 그때의 성수동과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실 것 같습니다.
내가 1978년쯤 성수동에 들어왔을 당시에는 여기가 다 밭이었어. 지금 전철 다니는 데는 도랑이었 지. 세무서 길을 포함해서 양쪽 두 길만 있었고, 이쪽에는 호박밭이고 오이밭이고 게다가 여기 우범 지대였어. 그리고 요꼬 공장(니트편직공장의 일본식 말), 인쇄공장들이 많았지. 그때는 여기 성수동에 구두공장은 없었어. 당시 다 논밭이었고, 지하 철이 생기면서 퇴계로나 남산 밑에 있던 공장들이 이쪽으로 옮겨오기 시작했지. 수제화 거리가 조성 되는 걸 쭉 봐왔어.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 건물도 많이 들어서고, 젊은 사람들도 카페 거리에 놀러 와. 옛날과 많이 달라. 천지차이야.
전태수 명장의 작업실에 걸린 사훈
수제화제작 도구들
공방(JS슈즈디자인연구소) 주변도 많이 변했습니다.
‘성수연방’(복합문화공간)이 생겼어. 젊은 사람들이 엄청 많이 와. 나는 ‘성수연방’을 잘 몰랐는데 오픈식을 한다고 여기서 나 일하는 모습, 신발이고 그런 걸 촬영해 갔어. 신발도 사 갔지. ‘성수연방’ 마크를 넣어서 제작해 달라고 해서 만들어줬지. 난 거기가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어(웃음). 여기 주변에 ‘자그마치’ 카페도 있지. 그 전에 이런 거 많이 들어오기 전에 자그마치 주변에 사람이 바글바글했어. 이 주변 카페에서 ‘배용준’도 봤어. 연예인도 많이 올 만큼 성수동이 변했어.
5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수제화를 만들어온 제조방식도 변화가 있을까요?
옛날에는 수제화를 만들 때 본드 대신 생고무를 녹여서 썼지. 탄피통에 생고무를 잘라서 넣고 휘발유를 부어서 뚜껑을 닫으면 고무가 녹아. 열 때 뻥 소리가 나거든. 그걸 본드 대신 썼어. 지금은 그런 걸 쓰지 않아. 우리 공방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이런 재료들을 다 알지. 바닥도 찹쌀풀을 쒀서 그런 거로 붙였어. 지금의 재료와는 물론 차원이 다르지. 지금의 재료는 견고하고, 잘 떨어지지 않고. 그래도 옛날에는 이런 재료로도 신발을 만들었어.
수제화 제작 과정을 알고 싶어요.
고객이 오면 캐주얼에 신을 건지 정장에 신을 건지 용도에 따라 디자인을 결정해. 요즘은 사진을 가지고 오는 고객들도 많아. 디자인을 결정하면 발 체크를 하지. 사이즈도 다양해. 발이 엄청 작은 사람, 엄청나게 큰 사람. 각자 자기 발에 맞춘 틀을 가지고 제작해. 가장 중요한 건, 만들 때 책임감을 가져야 해. 고객이더라도 내 가족의 신발을 만들 듯 그렇게 만들어. 만들면서 알아. 이게 잘 됐는지 안됐는지. 나는 좋은 신발, 명품신발을 만들기 위해 노력 해. 실제로 명품신발을 분석하기 위해 뜯어보고 그래. 그리고 해외 출장도 다니면서 제작 노하우가 쌓였어.
명장님이 제작하는 수제화는 기성화와 작업 공정에서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기성화는 한 디자인을 선정해서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내지. 내가 만드는 수제화가 기성화랑 다른 건 틀이야. 제일 중요한 게 틀이거든. 똑같은 것같으면서도 다 달라. 각자 가지고 있는 기술이 담겨 있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틀이 가장 좋다고 하지. 브랜드 신발들도 자기만의 틀이 있어. 근데 메이커라고 해서 다 편하진 않아. 작은 신발인지도 모르고 발 아파서 벗어두고 그러고. 기성화를 파는 곳, 그러니까 백화점에서도 ‘신으면 늘어나요’, ‘자꾸 신으면 편해져요.’라는 건 잘못된 거야. 편한 신발은 처음 신었을 때부터 편해. 내 신발은 굽이 높아도, 낮아도 늘 편하지.
그 모든 공정이 손으로 시작해 손으로 완성된다
명장님의 수제화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섬세한 작업공정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발 공정에 비해 저렴하지. 노력에 비해 저렴해. (전태수 명장의 수제화 한 켤레는 대략 35만원부터 시작한다.) 너무 비싸게 받으면 고객들이 부담스 럽고. 나는 일반 서민들도 수제화를 신었으면 좋겠어. 사실 수제화를 신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내 신발이 비싸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실제로 비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도 나는 일단 공방에 오면 ‘신어라도 보세요.’라고 해. 신어보면 편하니까. 백화점은 이 정도 가격이거나 더 비싸게 팔잖아.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사면 무조건 좋은 줄 알아. 그런 거 보면 그냥 안타깝지.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고객이 있나요?
지난 4월인가, 고객이 찾아왔는데 보통 사람보다 두 번째 발가락이 아주 길었어. 신발이 맞는 게 하나도 없어서 신발을 편하게 신는 게 소원이라고 나를 찾아온 거야. 그래서 내가 신발을 맞춰줬는데 태어나서 이렇게 편한 신발을 처음 신어본다고 고맙다고 12번은 더 인사를 하고 갔지. 그리고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오른발, 왼발 다른 사람, 길이가 길고 짧은 사람들. 너무 많지. 그 사람들의 신발을 만들어주고 편한 신발을 신을 수 있도록 내가 해결해줘야지. 몸이 아픈 사람들이 병원을 가듯, 발이 불편한 사람들은 나한테 오면 돼.
수제화 제작 외에 다른 활동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성동구에서 수제화 만드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어. 수강생이 40명 정도였는데 학생, 젊은 사람 그리고 50~60대 등 연령도 아주 다양했어. 다들 수제화 만드는 거에 관심이 많았지. 나한테 배워서 구두수선방을 차린 사람도 있어. 직업이 없다가 구두수선방을 차린 거야. 어떻게 보면 일자리 창출을한 셈이지. 여름 특강 같은 경우는 방학을 맞은 중학생들도 가르쳤어. 그중 재능이 있는 학생도 있어. 패턴, 재단, 미싱 등 단계 단계 가르칠 때마다 속도도 빠르고 이해도 습득도 빠른 사람이 있더라고. 그런 감각이 있는 친구들을 제자로 키우면 보람이 들지.
이렇게 수제화 제작 교육에 힘쓰는 이유가 있나요?
왜냐하면 이제 수제화를 배우는 사람들이 없잖아. 우리 때는 수제화를 만들고 배우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어. 수제화 공장이 있으면 늘 10대들이 10명 정도 있었으니까. 근데 지금은 없어. 다들 공부하잖아. 그럼 맥이 끊기는 거야. 만들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이런 교육이라도 하는 거야. 내가 해야지. 누군가는 이런 걸 이어가야 해.
핸즈인서울_성수展에서 전시 중인 전태수 명장의 작품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구두 박물관을 세우고 싶어. 그러려면 일단은 로또를 맞아야 해(웃음). 박물관을 성수동에 지으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서울 근교에 지으면 괜찮을것 같아. 세계적인 박물관 같은 곳처럼 구두의 역사, 도구, 기계 등 구두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전시하고 싶어. 그리고 중·고등학생들이 방문하고 체험할수 있도록 해 놓으면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내 작품을 해외에도 알리고 싶어. 우리나라가 이탈리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은데 사람들이 잘 몰라. ‘이방카 트럼프’가 내한했을때 비단 꽃신을 선물 겸해서 맞춰갔어. 영부인 ‘김정숙’ 여사도 버선코 구두를 맞췄고, 일전에는 가수 ‘싸이’도 무대에서 신을 신발을 맞췄어. 이런 기회로 알려지면 좋지.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젊은 디자이너들과 협업을 해보고 싶어. 그래도 무엇보다 이루고 싶은 건 박물관이야. 그런 걸 다 해놓고 가야지.